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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레슬링에서 배우는 슬로 이노베이션
2017-12-18 | 장재웅 에디터

안녕하세요, 장재웅입니다. 여러분은 ‘혁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뭔가 남들보다 한 발 먼저 기민하게 움직여서 새로운 것을 선보이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으시나요? 보통 혁신은 빠르게 움직여 뭔가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느낌이 강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작은 규모로 진행하는 점진적인 혁신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소개해 드릴 ‘슬로 이노베이션’입니다. 슬로 이노베이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슬로 컬처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화인류학자 그랜트 맥크래켄이 쓴 책 ‘치프 컬쳐 오피서’에서 그는 패스트 컬처와 슬로 컬처를 구분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맥크래켄에 따르면 패스트 컬처는 1시간 단위로 최신 트렌드나 새로운 유행어를 발견하기 위해 소셜 데이터를 모니터링 하고 작은 변화에도 발빠르게 대응해 기회를 잡는 문화를 말합니다. 미국에서 인기를 끈 버즈피드나 SPA의류 브랜드들의 성공이 좋은 예죠. 반대로 슬로 혹은 슬로 이노베이션은 당장 조직의 시야 바깥에 있거나, 속도는 더디지만 꾸준히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에 집중합니다. 당장 비즈니스를 바꿔야할 만큼 긴박하지 않은 변화들에 초점을 맞추는 셈이죠. 최근 4차 산업혁명 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혁신적 기술들의 등장을 보면 이해가 쉬울 듯 합니다. 일례로 자율주행차 기술은 발전 속도가 더뎌 보이지만 그 끝에는 자동차 산업 전체를 바꿀 파괴력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슬로 이노베이션이 주는 가장 큰 이점은 ‘통찰의 힘’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90년대 초반 초등학생들을 열광시켰던 미국 프로레슬링의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는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는 2014년 디지털 정기구독 서비스를 출시했습니다. 당시 업계 반응은 WWE가 너무 성급하다는 쪽이었죠. 이미 WWE는 Pay Per View서비스를 중심으로 TV방송을 통해 많은 수익을 얻고 있는 상황에서 디지털 정기구독 서비스가 오히려 종량제 수익모델을 잠식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WWE측은 성공을 자신했습니다. 충분한 데이터가 있었기 때문이죠. WWE는 서비스 런칭 전에 20년 넘게 고객들의 행동 패턴을 관찰합니다. 여기서 과거의 WWE경기 비디오테이프를 거래하거나 온라인 동영상 사이트에 올리는 등의 행동패턴을 보이는 다수의 충성 고객들을 발견합니다. 이후 WWE는 이 충성고객을 유지하기 위해 몇 가지 실험을 했고 그 결과로 디지털 정기구독 서비스를 런칭합니다. 얼핏 WWE가 트렌드를 따라간 것처럼 보이지만 WWE의 결정은 꾸준한 관찰과 슬로 이노베이션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슬로 이노베이션이 좋아 보이는데 그럼 왜 기업들은 잘 시도하지 않을까요. 일단 효과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간이 오래 걸리고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빠르고 큰 혁신의 결과가 나타나는 프로젝트에 투자금이 몰리고 상대적으로 슬로 이노베이션은 외면받게 됩니다. 게다가 당장 우선순위가 급하지 않은 프로젝트에 주로 슬로 이노베이션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해당 분기나 연도의 성과에 슬로 이노베이션의 영향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러면 경영진의 지원을 받기 어렵죠. 사람들의 업무 방식을 바꾸기 어려운 것과 안 그래도 바쁜 동료들에게 슬로 이노베이션에 동참하도록 만들기 어렵다는 점도 슬로 이노베이션이 현업에선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샘 퍼드 MIT비교미디어학과 연구위원 등은 HBR기고를 통해 슬로 이노베이션을 조직에 적용하는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필자들이 2015년 유니비전의 혁신 및 참여 센터‘의 총괄 운영을 맡으면서 슬로 이노베이션 조직이 주는 이로움과 어려움을 터득했다고 합니다. 함께 하나씩 살펴보죠. 먼저, 조직 내부의 기대수준을 신중하게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슬로 이노베이션은 패스트 컬처에 익숙한 다수의 사람들이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대수준을 신중하게 관리하지 않는다면 프로젝트에 적합하지 않은 KPI로 성과 측정이 이뤄지게 되고 그 결과는 리더들의 기대에 못 미치게 마련입니다. 그 결과 투자가 축소되면 슬로 이노베이션 프로젝트는 더욱 취약해지게 됩니다. 때문에 초기에 기대 수준 설정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과를 분명히 조명하는 것도 중요한데요, 조직 내부 구성원들 입장에서 슬로 이노베이션으로 일군 성과가 자신들의 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슬로 이노베이션에 대해 주인의식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문에 조직 내부 구성원을 고객으로 하는 부서일수록 슬로 이노베이션 도입시 이 부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조직 내부의 관계 증진도 힘써야 합니다. 슬로 이노베이션은 낯선 문화입니다. 낯선 것을 설명하고 전달하려면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혁신센터와 같은 조직의 운영은 오직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내게 무언가를 요청하고 함께 일하고자 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죠. 최고의 슬로 이노베이션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일어난다는 점도 명심해야 합니다. 나와 내 조직이 슬로 이노베이션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슬로 이노베이션에 필요한 문화 패턴을 더 능숙하게 찾아낸 사람들은 언제나 외부 전문가들입니다. 그리고 사내에 슬로 이노베이션 문화를 전파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새로운 문화 패턴을 직접 찾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누?별?찾아낸 패턴을 해석해 사내에 전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외부 전문가들에게 항상 귀를 열고 있어야 합니다. 예산 편성은 린하게 해야 합니다. 슬로 이노베이션은 큰 예산이 들지 않습니다. 때문에 작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 슬로 이노베이션이 적합한 프로젝트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정보 필터링, 정보 합성, 잠재적 패턴을 발견할 수 있는 프로세스의 개발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끊임없는 관찰과 경청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을 계속 경험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미 대처 방법을 아는 질문만 계속 던져서는 창의적인 길을 발견할 수 없죠. 이를 위해서는 조직 내부의 팀들이 외부 프로젝트 전문가들과 함께 어울리도록 연결시켜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팀을 익숙한 영역에서 벗어나 낯선 공간과 낯선 대화로 이끄는 시도가 슬로 이노베이션의 정착을 도울 것입니다. 필자들은 기고문 말미에 자신들이 유니비전에 몸담는 동안 위의 방법론들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고 그 결과 슬로 이노베이션에 대한 투자의 장기적 효과에 대한 가능성을 살짝 엿보는데 그쳤다고 회고합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몇가지 팀들을 중심으로 작게 천천히 하지만 지속적으로 슬로 이노베이션을 진행한다면 시장의 룰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 놓을 혁신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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